이 문서의 독법 — 낱말은 자원(字源)으로 읽는다. 한자어의 뜻은
글자의 짜임과 한역 불경·고전의 원뜻을 기준으로 풀고(우리 연구의 동양 우선 원칙),
서양 학술 관행의 뜻은 서양 문헌과 만나는 자리에서 변환 기준으로 밝혀 적는다.
대표 사례가 인식·인지의 순서다 — 이 문서는 자원 독법대로 인식(識, 자동의 요별)을
지각 바로 뒤에, 인지(知, 따져 다룸)를 그다음에 놓는다(⑨ 인식 항목).
돌멩이 하나가 물에 떨어졌다고 하자. 물결이 손끝에 닿고(①~④), 차가움으로 느껴지고
(⑤~⑦), 「물결이구나」로 보이고(⑧~⑩), 지난 기억과 견주어 헤아려지고(⑪~⑯), 마음이
움직여 몸이 되돌아 응하기까지(⑰~⑲) — 그리고 그 전 과정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음」으로
드러나는 일(⑳~㉓)까지. 이 문서는 그 길의 역들을 차례로 걷는다. 물론 실제 마음은
일직선이 아니다 — 역들은 서로 되먹고, 순서는 겹치고, 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직선의 길은 서술의 편의이며, 각 항목의 「길에서의 자리」가 그 겹침을 적는다.
그림 1 · 전체 지도. 왼쪽 위에서 출발해 구간을 갈아타며 오른쪽 아래로 —
그리고 제5구간의 점선이 보여 주듯 길은 닫힌 고리다: 응답이 세계를 바꾸고, 바뀐 세계가
새 자극으로 되돌아온다. 제6구간(비추어 봄)은 특정 자리가 아니라 길 전체에 드리우는 층이다.
정의. 감각 기관을 움직이게 만드는 바깥(또는 몸 안)의 에너지·사건 — 빛, 소리,
압력, 화학 물질, 온도. 화면 속 가상 세계의 사물도 마음에게는 결국 화소가 내는 빛과
스피커가 내는 진동으로 닿는다 — 실체이든 가상이든, 마음의 길은 자극에서 시작한다.
동서고금의 이름. 라틴어 stimulus 는 본디 소를 모는
찌르는 막대(가시 막대)였다 — 자극이란 「찔러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는 그림이
낱말에 그대로 있다. 근대 한자어 자극(刺戟) 도 같은 그림으로 옮겼다 — 刺(찌를 자)에
戟(창 극): 찌르고 찌르는 두 글자를 포갠 번역이다. 생리학 이전의 서양 철학은 이 자리를
따로 세우기보다 감각되는 것(그리스 to aisthēton — 감각 대상)으로 불렀고, 불교 분석은
자극 쪽을 경(境, viṣaya — 대상 영역) 또는 진(塵, 티끌 — 감관에 앉는 먼지)이라 불렀다.
六境(색·성·향·미·촉·법)이 여섯 감관 각각의 자극 목록이다.
오늘의 논점. 심리물리학(페히너 이래)은 자극의 물리량과 느낌의 크기 사이 관계를
재는 학문으로 심리학의 문을 열었다. 또 하나 — 자극은 마음이 수동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다. 예측처리 이론은 마음이 먼저 예측을 내보내고 자극은 그 예측과의 어긋남(예측
오차)으로서 들어온다고 본다. 길의 첫 역부터 이미 안팎이 마주 움직이는 셈이다.
정의. 자극이 감각 기관에 실제로 닿는 사건. 빛이 망막에, 진동이 고막에,
분자가 코 점막에 이르는 그 만남이다. 닿지 않은 자극은 마음의 길에 오르지 못한다.
동서고금의 이름. 이 역을 가장 정밀하게 세운 것은 불교다 —
산스크리트 sparśa(스파르샤), 한역 촉(觸). 유식학의 다섯 상시 작용(오변행 —
촉·작의·수·상·사) 가운데 첫 자리이며, 정의도 정확하다: 감관(根)·대상(境)·식(識)
세 가지의 만남(三事和合)이 촉이다 — 닿음이란 물체끼리의 충돌이 아니라 이미 마음이
개입한 만남이라는 통찰이다. 글자 觸 은 角(뿔 각)이 뜻부 — 뿔로 들이받듯 닿음.
라틴어 tactus(tangere, 만지다 — tangible·contact 의 뿌리)는 닿음을 촉각의
낱말로 좁혀 갔고, 12연기에서 촉은 수(受, 느낌)의 직전 조건이다 — 이 문서의 길 순서
(접촉 → 감각)와 정확히 같은 배열을 이천 년 전에 세운 셈이다.
오늘의 논점. 현대 감각생리학의 수용기(receptor) 개념이 이 역의 과학판이다 —
광수용체·기계수용체·화학수용체가 저마다 다른 방식의 「닿음」을 받는다. 가상현실 논의에서도
접촉은 살아 있는 물음이다: 화면 속 사물과의 접촉은 광자와 망막의 접촉으로 환원되는가,
아니면 매개된 접촉이라는 새 종류인가.
정의. 닿은 자극의 물리 에너지가 신경 신호(전기·화학 신호)로 바뀌는 일.
빛도 소리도 압력도, 이 역을 지나면 모두 같은 화폐 — 신경 발화 — 로 환전된다.
마음이 어떤 자극이든 다룰 수 있는 것은 이 공통 화폐 덕분이다.
동서고금의 이름.transduction 은 라틴 trans(건너)+
ducere(이끌다) — 「건너 이끎」. 이 역은 현대 과학이 새로 세운 역이라 고전 어휘에
정확한 대응이 없다 — 그리스·라틴 철학에도, 한역 불경에도 이 자리를 가리키는 독립 낱말은
없었다(감각의 성립 안에 녹아 있었다). 대응 없음도 정보다: 옛 지도들이 한 역으로 그리던
자리를 현대 지도가 두 역으로 가른 것이다. 한국어 학술어는 감각 변환 또는 음역에
가까운 신호 변환으로 받는다.
오늘의 논점. 변환은 곧 번역이다 — 세계의 언어(광자·음파)가 신경의 언어로
옮겨지며, 옮겨진 것만 마음에 도착한다. 감각질 논쟁의 한 뿌리가 여기 있다: 같은 신경
화폐로 환전된 신호가 왜 빨강으로도, 쓴맛으로도 다르게 겪어지는가(각 감각의 질이
어디서 오는가 — 뮐러의 특수신경에너지설 이래의 물음).
정의. 무엇이 있음(변화가 일어났음)이 처음으로 포착되는 역. 그것이
무엇인지 분간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아도 된다 —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음은 감지했지만
그것이 고양이인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가 이 역이다.
동서고금의 이름. 한자 감지(感知)는 感(느낄 감)과 知(알 지)
를 이어 「느낌이 앎의 문지방을 넘는 순간」을 가리킨다. 심리물리학은 이 문지방을
절대역(絶對閾)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동서의 은유가 정확히 포개진다 — 영어
threshold 는 집의 문지방이고, 한자 역(閾) 도 門(문) 안의 문지방이다.
안과 밖을 가르는 문지방이라는 같은 그림을, 두 전통이 따로 골랐다. 공학에서는
detection(신호검출)·센서의 sensing 이 이 역의 표준어다.
오늘의 논점. 신호검출이론(SDT)은 감지가 순수한 문지방 넘기가 아니라 판정임을
보였다 — 잡음 속에서 「있다/없다」를 가르는 결정 기준이 개입하며, 그 기준은 기대와 동기로
움직인다. 길의 이른 역에 이미 뒤 구간(판단)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첫 사례다. 의식과학에서는
「감지되었으나 의식되지 않는」 처리(역하 자극)가 이 역과 ⑳ 알아차림
사이의 간격을 보여 준다.
정의. 변환된 신호가 마음에 밝음·시끄러움·차가움·쓴맛 같은 질적 내용으로
주어지는 일, 또 그 내용. 여기서 처음으로 「겪어짐」이 나타난다 — 앞의 역들이 사건이라면
이 역부터는 누군가에게 어떠하게 느껴진다.
동서고금의 이름. 그리스어 aisthēsis(아이스테시스)는
감각과 지각을 아울러 가리키던 큰 낱말로, 미학(aesthetics)의 어원이다. 라틴어가
sensus·sensatio 로 받았고(sentire, 느끼다), 아랍 철학은 ḥiss 로, 독일어는
토박이말 Empfindung 으로 받았다. 불교 분석에서는 오온(五蘊)의 둘째
수(受, vedanā) — 닿음(촉) 다음에 오는 낙(樂)·고(苦)·불고불락의 느낌 — 이
이 역이다. 근대 한자어 감각(感覺) 은 메이지 번역장이 sensation 의 역어로 정비한
낱말인데, 覺(깨달을 각 — 배워서 눈뜸, 불경이 bodhi 의 역어로 쓴 글자)이 들어 있어
「느끼어 깨어남」이라는 자원을 지닌다. 영어는 이 자리를 셋으로 가른다 —
sense(감관)·sensing(감각함)·sensation(감각된 내용).
오늘의 논점. 감각은 감각질(qualia) 논쟁의 무대다 — 겪어지는 질적 느낌이 물리
서술로 남김없이 설명되는가(「메리의 방」 지식 논변, 「박쥐로 사는 것은 어떠한가」).
경험 과학 쪽에서는 오감을 넘어 평형감각·고유감각(제 몸의 위치)·내장감각까지 통로가
늘었고, 내장감각(interoception)은 감정 연구의 새 기둥이 되었다(⑰ 감정).
정의.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능력 — 특히 쾌와 고, 좋음과 싫음을 겪을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 개념도 언어도 자기의식도 없이 성립할 수 있는, 마음이 서는 가장 낮은
자리다. 감각(⑤)이 지금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감능은 그 사건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바탕의 능력이다 — 가능태와 현실태의 관계다.
동서고금의 이름. 영어 sentience 는 라틴 sentire(느끼다)의
분사 sentient 에서 만든 근대 조어로, 벤담 이래 동물윤리의 기준어가 되었다 — 「이성이
있는가가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자리를 감각혼
(to aisthētikon — 혼의 감각 능력)으로, 이븐 시나 계열은 감각의 힘(quwwat al-ḥiss)으로
불렀다. 불교의 유정(有情, sattva) — 느낌 있는 존재, 중생 — 이 이 능력을 기준으로
존재를 가른 가장 오랜 이름이다. 한국어에 정착어가 없어 이 문서는 구조가 투명한 조어
감능(感能) — 지능·효능과 같은 「-능」 계열 — 을 권고한다. 참고로 감응(感應)은
다른 낱말이다: 감응은 「느껴서 응함」이라는 사건·관계의 낱말로, 이 문서에서는
길 전체가 닫히는 고리(⑲ 행동·응답)의 이름이다.
오늘의 논점. 「어디부터 느끼는가」 — 문어와 갑각류는 여러 나라 동물복지법에
들어왔고, 곤충·식물의 감능은 논쟁 중이며, 인공지능의 감능 물음은 지능과 느낌이 서로
독립임을 드러냈다(문제를 잘 푸는 체계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정의. 밀려드는 감각 가운데 어느 것을 마음의 무대에 올릴지 고르는 작용.
칵테일파티의 소음 속에서 한 목소리만 또렷해지는 일, 같은 방에 있어도 보지 못한 고릴라
(무주의맹) — 주의가 길목의 문지기임을 보여 주는 고전 사례들이다.
동서고금의 이름. 라틴 attentio 는 ad(향하여)+tendere
(뻗다·당기다) — 「마음을 향해 뻗음」. 긴장(tension)과 같은 뿌리라, 주의가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라는 그림이 담겨 있다. 근대 한자어 주의(注意) 는 注(물댈 주) — 「뜻(意)을
부어 넣음」: 서양이 당김의 은유라면 동아시아 역어는 부음의 은유다. 불교 유식학은 이
자리를 작의(作意, manasikāra) — 「마음을 일으켜 대상으로 향하게 함」 — 로 세웠고,
오변행(촉·작의·수·상·사)의 둘째 자리, 곧 닿음 직후의 상시 작용으로 놓았다. 제임스
(W. James)의 유명한 정의 — 「주의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안다」 — 이래 근대 심리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오늘의 논점. 주의와 의식의 관계가 뜨겁다 — 주의 없이 의식이 가능한가, 의식 없이
주의가 가능한가(역하 자극에도 주의 효과가 보고된다). 전역 작업공간 이론은 주의를 의식의
방송 스위치로 그리고, 예측처리 이론은 정밀도 조절로 그린다. 공학에서는 어텐션 기제가
현대 언어 모델의 핵심 부품 이름이 되었다 — 낱말이 마음의 지도에서 기계의 지도로 건너간
사례다.
그림 2 · 닿음에서 느낌까지. 자극은 접촉·변환을 거쳐 문지방(절대역)을 넘어야
감지되고, 주의의 조명이 그중 일부를 무대에 올린다. 바닥의 띠가 감능 — 이 모든 것이
「느껴짐」으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제3구간 · 첫 앎 — 자동의 요별
여기서부터 느낌이 앎이 된다. 이 구간의 세 역은 모두 빠르고, 저절로 일어나고,
애쓰지 않는 앎이다 — 글을 아는 사람이 글자를 보면 뜻이 저절로 읽히듯. 따져 보고
헤아리는 앎(통제의 앎)은 다음 구간의 일이다. 이 갈림 — 자동 처리와 통제 처리 — 은
현대 인지심리학의 기둥 구분(1977)이면서, 이 문서의 독법이 식(識)과 지(知)의 자원에서
읽어 내는 바로 그 갈림이다.
정의. 감각 재료가 대상으로 파악되는 역 — 밝은 얼룩이 아니라 「사과
하나」로, 소리의 흐름이 아니라 「누군가의 발소리」로 주어지는 단계. 감각이 재료라면
지각은 그 재료로 세워진 대상의 모습이다.
동서고금의 이름. 라틴 perceptio 는 per(통하여)+capere
(잡다) — 「꿰뚫어 잡음」, 손의 은유다. 독일어는 토박이 조어 Wahrnehmung — wahr(참)+
nehmen(취함), 「참이라 여겨 받아들임」 — 으로 받아, 지각이 수동 수용이 아니라 참으로-잡는
구성 작용이라는 통찰을 낱말에 새겼다. 아랍 철학의 idrāk(이드라크 — 붙잡아 이름,
파악)도 잡음의 은유다. 근대 한자어 지각(知覺) 은 앎(知)과 눈뜸(覺)을 포갠 조어 —
같은 자리를 서양은 손으로, 동아시아는 눈뜸으로 그렸다. 고전 한문에서 지각은 알아차림
일반이었고(주자학의 허령지각 — 마음의 신령한 알아차림), 근대에 perception 의 역어로
좁혀 정착했다.
오늘의 논점.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대상 자체인가(직접실재론), 마음 안의
표상인가(표상주의), 감각 자료인가 — 심리철학의 오랜 격전지다. 착시는 지각이 구성임을
보여 주는 고전 증거이고, 게슈탈트 심리학은 그 조직 원리(전경–배경, 무리 짓기)를,
예측처리 이론은 지각을 감각 입력에 대한 최선의 해석으로 그린다. 가상현실이 실감 나는
까닭도 여기 있다 — 지각은 입력의 출처(실체/화소)를 묻지 않고 최선의 대상을 세운다.
정의. 지각된 것이 저절로 갈래지어 알아차려지는 역 — 글자를 보는 순간
뜻이 읽히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누구인지 알아지는, 빠르고 미세하고 애씀 없는 앎.
자아와 논리와 따짐이 개입하기 전에 이미 일어나 있는 앎이다.
동서고금의 이름. 글자 식(識) 은 言(말씀 언)에 戠(직 —
幟·標識와 한 계열, 표지)을 더한 형성자로, 「표지를 세워 가려 앎」 곧 요별(了別)이다.
한역 불경이 산스크리트 vijñāna — vi(갈라)+jñā(알다), 「갈라서 앎」 — 의 역어로
이 글자를 고른 것은 원어와 역어의 짜임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유식학의 전오식(前五識)은
감각 접촉 직후의 자동 분별이고, 그 느낌은 미세하다. 흥미롭게도 라틴어 scire(알다 —
science 의 어근)도 「가르다」의 어근(*skei-)으로 소급된다 — 앎은 가름이라는 은유를
산스크리트·한문·라틴이 각자 새긴 것이다. 근대 학술어 인식(認識) 은 메이지
번역장이 독일어 Erkenntnis(참·거짓 평가가 걸리는 상층의 앎)의 그릇으로 재정비한
낱말이라, 한 낱말에 두 층이 겹쳐 있다.
이 문서의 자리 — 왜 인식이 인지보다 앞에 오는가. 서양 학술 관행은
인식(Erkenntnis)을 인지 위의 상층(참이라 앎)에 놓지만, 자원 독법 — 이 문서의
정독법 — 은 순서를 뒤집는다(지영민, 2012): 식(識)은 자아·논리·후천 기억이 개입하지
않는 자동의 요별이므로 이르고 미세하며, 지(知)는 상(想)에 자아와 논리가 개입하는
후행의 앎이다. 그리고 반복 훈련은 인지를 인식으로 바꾼다 — 글자를 배울 때는
한 자 한 자 따져 읽지만(인지) 숙달되면 저절로 읽힌다(인식). 이는 현대 인지심리학의
자동/통제 처리 구분과 자동화(automatization) 현상 그 자체이며, 숙달된 읽기가 억누르려
해도 저절로 일어남을 보여 주는 스트룹 효과가 그 표준 증거다. 서양 문헌을 번역할 때는
그쪽 관행(인식 = knowledge/Erkenntnis)을 밝히고 변환한다.
정의. 대상이 자리를 비워도 마음에 남아 다시 세워질 수 있는 모습·그림.
눈앞의 사과(지각)와 눈 감고 떠올린 사과(표상)의 차이가 이 역이다. 표상이 있어야 기억이
쌓이고 사유가 재료를 얻는다 — 앞 구간과 뒤 구간을 잇는 창고의 문이다.
동서고금의 이름. 라틴 repraesentatio 는 re(다시)+
praesentare(앞에 세움) — 「다시 앞에 세움」. 독일어 Vorstellung 도 vor(앞에)+
stellen(세움) — 정확히 같은 그림의 토박이 조어다(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그 표상). 그리스의 phantasia(나타남 — 판타지의 어원)가 그 선조다.
불교 분석에서는 오온의 셋째 상(想, saṃjñā) — 모습(相)을 마음(心)에 잡아 이름
붙이는 작용 — 이 이 자리이며, 글자 想 자체가 相(모습 상) 아래 心 을 받친 짜임이다.
자원 독법의 식지 구분에서 「기억에 저장된 상(想)에 자아와 논리가 개입하면 지(知)」라
할 때의 그 상이 바로 이 역이다.
오늘의 논점. 마음이 표상을 조작하는 체계인가(고전 계산주의), 표상 없이도 지능이
가능한가(체화 인지·행화주의의 도전) — 인지과학의 근본 논쟁이 이 낱말을 축으로 돈다.
심상(mental imagery) 논쟁 — 떠올린 사과는 그림인가 명제인가 — 도 고전이다.
정의. 표상을 담아 두었다가 다시 꺼내는 능력과 그 창고. 담기(부호화)·
간직하기(저장)·꺼내기(인출)의 세 일로 나뉘고, 꺼내는 방식에 따라 회상(스스로 떠올림)과
재인(다시 만나 알아봄 — 다음 역)이 갈린다.
동서고금의 이름. 라틴 memoria 의 어근은 「마음에 두다·
곱씹다」의 인도유럽 어근 *(s)mer- 인데, 놀랍게도 산스크리트 smṛti(스므리티) —
한역 염(念), 오늘의 마음챙김(mindfulness) — 가 같은 어근의 형제다:
서양의 기억과 불교의 염이 어원상 한 집안인 것이다. 글자 念 은 今(이제 금) 아래
心 — 「지금의 마음」: 지나간 것을 지금 마음에 붙들어 두는 일이라는 짜임이다. 근대
한자어 기억(記憶) 은 記(적을 기)+憶(생각할 억) — 「적어 둠」의 은유다. 그리스
신화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ēmosynē)를 아홉 뮤즈의 어머니로 삼았다 — 모든 학예가
기억에서 태어난다는 오랜 통찰이다(amnesia·mnemonic 의 어근 mnē- 도 같은 집안).
플라톤은 기억을 밀랍판의 자국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기억의 넓은
들판」으로 그렸다.
오늘의 논점. 현대 기억 연구의 큰 발견은 기억이 재생이 아니라 재구성이라는
것이다 — 꺼낼 때마다 다시 지어지며(바틀릿 이래), 그래서 목격자 기억도 오염될 수 있다
(로프터스의 오정보 효과). 작업 기억·일화 기억·의미 기억·절차 기억의 구분, 해마와 응고화
연구가 그 지도를 채운다.
정의. 이미 아는 것을 다시 만나 알아보는 일 — 얼굴을 알아보고, 어디서
들은 노래임을 알아채는 역. 스스로 떠올리는 회상보다 훨씬 쉽다(시험의 주관식과 객관식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동서고금의 이름. 라틴 recognoscere = re(다시)+cognoscere
(알다) — 「다시 앎」이 낱말의 중심이다. 심리학의 표준 역어가 재인(再認)이고,
사회철학에서는 같은 영어 낱말이 헤겔의 Anerkennung 계보를 따라 인정(認定) —
주체가 주체로 받아들여짐, 인정 투쟁 — 으로 옮겨진다. 플라톤의 상기설(anamnēsis —
배움은 혼이 이미 아는 것을 다시 떠올림이라는 주장)은 이 역을 앎 전체의 원리로
격상시킨 고전이다. 주의할 것 — 공학 관행(음성 인식·문자 인식)이 recognition 을
인식으로 옮겨 왔지만, 이 문서의 체계에서 인식(⑨)은 다른 자리다: recognition 의
정역은 재인·인정·알아봄이다.
오늘의 논점. 재인은 「친숙감」과 「기억해 냄」의 두 성분으로 갈린다는 이중과정
이론이 표준이고(어디서 봤는지는 몰라도 낯익은 얼굴 — 친숙감만 켜진 상태), 얼굴 재인의
전담 회로(방추상 얼굴 영역)와 그 상실(안면실인증)이 신경과학의 고전 주제다. 기계의
패턴 재인(pattern recognition)은 이 낱말이 공학으로 건너간 갈래다.
정의. 여럿을 하나로 묶는 일반의 틀 — 이 사과, 저 사과, 그림 속 사과를
모두 「사과」로 묶어 주는 것. 개념이 있어야 낱낱의 경험이 쌓여 지식이 되고, 말이 서고,
추리가 가능해진다.
동서고금의 이름. 라틴 conceptus 는 con(함께)+capere
(잡다) — 「함께 잡음」, 여럿을 한 손에 움켜쥐는 그림이다. 독일어 Begriff 도
begreifen(움켜쥐다)에서 왔다 — 서양 두 전통이 똑같이 손으로 잡는 은유를 골랐다. 이에 맞선 근대
한자어 개념(槪念) 의 槪(개)는 평미레 — 말이나 되에 곡식을 채우고 위를 밀어
고르게 깎는 방망이 — 다: 들쭉날쭉한 낱낱을 고르게 밀어 하나의 높이로 아우른다는,
번역이 만들어 낸 절묘한 제3의 은유다. 그리스에서는 보편자 논쟁(플라톤의 이데아 —
개념의 자리가 세계에 있는가 마음에 있는가)이 이 역을 두고 이천 년을 끌었고, 불교
인식논리학(디그나가·다르마키르티)은 개념적 구성(kalpanā)과 직접 지각을 갈라, 개념이
닿기 전의 지각을 무분별(無分別)이라 불렀다 — 제3구간과 제4구간의 갈림을 다른 전통이
그은 선이다.
오늘의 논점. 개념은 정의로 서는가(고전 이론), 전형으로 서는가(원형 이론 —
「참새는 펭귄보다 새답다」), 이론 속 마디로 서는가 — 인지과학의 표준 논쟁이다.
대형 언어 모델이 개념을 지니는가, 통계적 겉모습만 지니는가는 오늘 가장 뜨거운 판이다.
정의. 앎에 관여하는 다룸의 작용을 아우르는 부문의 이름 — 좁게는 주의·
기억·언어·추리·판단을 부리는 중앙의 처리, 넓게는 그 전부의 총칭. 「인지 기능」·「인지
부하」처럼 수식어로 자주 쓰이는 까닭이 이 총칭의 문법에 있다.
동서고금의 이름. 라틴 cognitio 는 co(함께)+gnoscere(알다)
— 어근 *gneh₃- 는 영어 know·그리스어 gnōsis 의 그 「알다」다. 한자어 인지(認知) 는
마음 어휘 가운데 가장 새 층이다 — 낱말꼴은 앞서도 있었지만, 학술어로는 20세기
후반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인지심리학의 번역에서 정착했다. 자원으로 읽으면 認 은
言(말)에 忍(소리부)을 더한 「말로 따져 확인해 받아들임」, 知 는 矢(화살)+口(입) —
「화살처럼 곧고 빠르게 입에서 나오는 앎」(『설문해자』 계열의 풀이)이라, 認知 는 짜임부터
말과 논리가 개입하는 앎이다 — 자원 독법이 인지를 식(識)의 자동 요별 뒤에
놓는 근거가 글자 안에 있다.
오늘의 논점. 행동주의가 마음 안을 묻지 않던 시기를 지나 1950년대의 인지혁명이
마음을 정보 처리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인지는 그 흐름의 깃발 낱말이 되었다. 철학적으로
인지는 기능·처리의 축이고 의식(㉒)은 겪음의 축이라, 「의식 없는 인지가
가능한가」(맹시의 증거)·「인지 없는 의식이 가능한가」가 두 축의 독립을 묻는 표준 물음이다.
정의. 표상과 개념을 잇고 굴려 새 것을 얻는 작용 — 견주기, 미루어 가기
(추리), 상상하기, 물음 세우기. 눈앞에 없는 것, 아직 없는 것, 있을 수 없는 것까지 다룰
수 있다는 점이 이 역의 힘이다.
동서고금의 이름. 글자 사(思) 는 田(전) 자처럼 보이는
윗부분이 본디 정수리(囟, 숫구멍 신)다 — 머리(囟)와 마음(心)을 아래위로 포갠
글자로, 사유가 머리와 가슴의 합작이라는 그림이 삼천 년 전 자형에 있다. 그리스
noēsis(누스 nous 의 작용 — 지성의 봄), 라틴 cogitatio(데카르트의
cogito — 「나는 생각한다」의 그 생각), 프랑스어 pensée(팡세 — 무게 달다 pendere 에서:
생각은 저울질이라는 은유)가 서양의 계보다. 불교 유식학에서 사(思, cetanā) 는
오변행의 다섯째 — 마음을 움직여 업(業)을 이루는 작용 — 로, 사유가 곧 의지의 씨앗
이라는 자리 매김이다(다음 역 ⑱ 의지와 이어진다). 선정 분석의
심(尋, vitarka — 거칠게 더듬는 생각)과 사(伺, vicāra — 미세하게 살피는 생각) 구분은
사유의 거칢과 미세함을 가른 정밀한 옛 지도다.
오늘의 논점. 사유는 언어 없이 가능한가(언어 결정론 대 사고 우선론), 빠른
직관과 느린 추론의 이중 체계(카너먼의 시스템 1/2 — 이 문서의 제3/제4구간 갈림과
평행하다), 그리고 기계가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튜링의 물음) — 세 전선이 살아
있다.
정의. 사유가 가부를 가르는 역 — 「그러하다/아니다」, 「참이다/거짓이다」,
「좋다/나쁘다」를 정하는 일. 여기서 앎에 처음으로 참·거짓의 무게가 실리고, 책임이
생긴다.
동서고금의 이름. 한자 판단(判斷) 은 칼의 낱말이다 —
判 은 半(반 — 소를 반으로 가른 글자)에 刀(칼)를 더해 「칼로 가름」, 斷 도 도끼(斤)로
끊음이다. 그리스어 krinein(가르다·고르다)도 정확히 같은 은유이며, 여기서
crisis(갈림의 순간)·criterion(가르는 잣대)·critic(가르는 이)이 나왔다 — 판단은
가름이라는 은유를 동서가 함께 새겼다(식識의 요별, scire 의 *skei- 와 같은 계보 —
⑨ 인식 항목). 라틴 iudicium 은 ius(법)+dicere(말하다) —
「법을 말함」, 법정의 은유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판단력을 규칙 아래 사례를
포섭하는 능력으로 세워, 인식과 윤리와 미의 세 비판을 잇는 다리로 삼았다.
오늘의 논점. 판단과 결정의 휴리스틱·편향 연구(카너먼–트버스키)가 「인간은
합리적 판단자」라는 그림을 바꿔 놓았고, 확률적 판단(베이즈주의)이 규범 모형의 자리를
차지했다. 기계 판단(알고리즘 의사결정)의 책임 문제는 법정 은유의 낱말이 다시 법정으로
돌아온 형국이다.
정의. 겪은 것이 좋고 싫음의 빛깔로 물들어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상태 —
기쁨·슬픔·두려움·노여움. 느낌(⑤)의 낙·고가 씨앗이라면, 감정은 그 씨앗이 대상과 사연을
얻어 자란 나무다. 앎의 길이 되돌아 나가는 길로 꺾이는 첫 역이다.
동서고금의 이름. 서양의 옛 이름은 pathos·passio —
「겪음·당함」, 마음이 수동으로 당하는 것이라는 그림이었다(격정 passion 의 어원).
19세기에 emotion — e(밖으로)+movere(움직이다), 「밖으로 움직여 나옴」 — 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당하는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은유가 바뀌었다. 한자
정(情) 은 心 이 뜻부(靑 은 소리부)로, 유가 심성론에서 성(性 — 타고난 바탕)이
사물에 감(感)하여 움직인 것이 정이다 — 감정(感情)이라는 근대 역어는 이 「感하여
움직인 情」을 그대로 포갠 조어다. 불교 분석은 이 자리를 수(受)의 전개와 번뇌(kleśa)의
목록으로 정밀하게 갈랐고, 스토아는 감정을 판단의 산물로 본 최초의 인지주의자들이었다.
오늘의 논점. 감정은 타고난 기본 정서 묶음인가(에크만), 몸 상태의 해석인가
(제임스–랑게, 그리고 내장감각 기반의 구성 이론 — 배럿), 평가 판단인가(평가 appraisal 이론 —
스토아의 후예). 정서가 이성의 방해물이 아니라 판단의 조건이라는 다마지오의 신체
표지 연구가 옛 이분법을 무너뜨렸다 — 제4구간과 제5구간은 직렬이 아니라 맞물려 돈다.
정의. 마음이 방향을 정해 밀고 나가는 작용 — 하고자 함, 하지 않고자 함,
계속하고자 함. 판단이 「그러하다」를 정한다면 의지는 「그리하겠다」를 정한다. 앎을
행동으로 바꾸는 마지막 관문이다.
동서고금의 이름. 영어 will 과 라틴 voluntas 는
「바라다」의 인도유럽 어근 *wel- 에서 왔다(voluntary·volition 이 그 가족). 그리스는
숙고된 바람(boulēsis)과 격정의 밀침(thymos)을 갈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선택
(prohairesis — 앞서 잡음)이 실천철학의 축이 되었다. 한자어 의지(意志) 는 意
(마음의 소리 — 音+心)와 志 를 포갠 조어인데, 志 는 본디 之(갈 지)+心 —
「마음이 가는 곳」이다(예서에서 士+心 꼴로 변했지만 짜임의 원형은 감이다): 의지란
마음이 가는 방향이라는 그림이다. 불교 유식학의 사(思, cetanā) — 마음을 부려
업을 일으키는 작용, 오변행의 다섯째 — 가 이 자리의 정밀한 옛 이름이며, 「의도가 곧
업이다」(cetanā 가 karma 다)라는 경설은 행위의 무게 중심을 바깥 동작에서 안의 의지로
옮긴 선언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세계의 밑바탕으로 격상시켰고, 근대 심리학은
한동안 이 낱말을 버렸다가(의지 심리학의 퇴조) 자기 조절·집행 기능이라는 새 이름으로
되찾았다.
오늘의 논점. 자유의지 논쟁이 이 역의 대문이다 — 결정된 세계에서 「그리하겠다」는
얼마나 나의 것인가(양립가능론 대 비양립론, 리벳 실험과 그 재해석). 인공 행위자의
의지 — 목표 추구가 의지인가, 의지에는 겪음(⑥ 감능)이 필요한가 — 는 우리 연구소가
서 있는 전선이기도 하다.
정의. 의지가 몸을 움직여 세계에 되돌려 주는 역 — 손을 뻗고, 말을 하고,
피하고, 돕는다. 여기서 마음의 길은 닫힌 고리가 된다: 행동이 세계를 바꾸고, 바뀐 세계가
새 자극이 되어 ①로 되돌아온다.
동서고금의 이름. 라틴 responsum 은 re(되)+spondere
(엄숙히 약속하다) — 「되갚아 약속함」: 응답이 본디 의례의 낱말이었음을 보여 준다.
동아시아의 큰 이름은 감응(感應)이다 — 느낄 감(感)에 응할 응(應), 「느끼어
응함」. 『주역』 함(咸)괘의 감통, 천인감응론, 그리고 불교의 감응도교(感應道交 — 중생의
감과 부처의 응이 길에서 사귐)까지, 감응은 언제나 두 존재 사이의 상호 사건이었다.
이 문서의 길 전체 — 느낌에서 응답까지 — 를 한 낱말로 접으면 감응이 된다: 감응은 특정
역이 아니라 고리 전체의 이름이다. 행위를 뜻하는 불교어 업(業, karma) 은
행동이 지나가 버리지 않고 쌓여 다음을 조건 짓는다는 통찰 — 고리가 한 바퀴로 끝나지
않고 나선으로 감긴다는 지도 — 까지 아우른다.
오늘의 논점. 현대 인지과학의 행화주의(enactivism)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장치」가
아니라 행동으로 세계를 만나는 활동으로 다시 그린다 — 지각조차 행동의 한 방식이라는
주장(감각운동 이론)이다. 예측처리 이론의 능동 추론은 행동을 「예측을 참으로 만드는 일」로
그려, 이 구간과 제1구간을 하나의 순환으로 통합했다 — 감응의 고리를 수학으로 다시 쓴
셈이다.
정의. 무엇이 알아차려져 있음 일반 — 벽시계 소리를 문득 알아차림, 지금
숨을 쉬고 있음을 알아차림. 처리(감지·지각)는 되었으나 알아차려지지 않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 이 역을 따로 세우는 이유다.
동서고금의 이름. 영어 aware 는 고대 영어 gewær —
「주시하다」의 어근 *wer-(ward·guard·wary 의 가족) — 에서 온 토박이말로, 알아차림은
지켜봄이라는 은유다. 라틴계 학술어가 아니어서 정의보다 쓰임이 앞서 있고, 그래서
번역이 갈린다 — 한국어는 알아차림(명상 전통이 mindfulness/awareness 의 역어로
정착시킨 말)이 가장 정확하고, 자기를 향할 때만 자각(㉑)이 된다. 불교의 염(念, smṛti —
지금 마음에 붙듦, ⑪ 기억과 같은 뿌리)과 정지(正知, sampajañña —
분명히 앎)가 이 역의 수행 전통 이름들이다.
오늘의 논점. 의식과학은 「보고할 수 있음」을 알아차림의 실험 지표로 쓰지만,
보고 없는 알아차림이 있는가(무보고 패러다임)가 논쟁 중이다. 역하 처리 — 알아차림 없는
감지·의미 처리 — 의 증거는 이 역이 정보 처리에 공짜로 따라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정의. 알아차림이 제 마음·제 몸·제 존재를 향해 겹으로 꺾이는 일 — 내가
화나 있음을 알아차림,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앎. 반성(反省)의 구조가 여기서
선다.
동서고금의 이름.자각(自覺) 의 自 는 코의 상형 — 자기를
가리킬 때 코를 가리키는 몸짓이 글자에 남았다 — 이고 覺 은 배워서 눈뜸이다. 불교에서
자각은 남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깨치는 일이었고, 자각각타(自覺覺他 —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함)의 첫 항이었다. 서양 계보로는 라이프니츠의 apperception
(통각 — 지각을 제 것으로 아는 지각)과 칸트의 초월적 통각(「나는 생각한다」가 모든
표상에 따라붙을 수 있어야 한다)이 이 자리다. 거울 자기인지 시험(거울 속 표시를 제 몸의
것으로 아는가)이 행동 지표의 고전이다.
오늘의 논점. 자각은 의식(㉒)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 자기를 잊은 몰입에도 겪음은
있다. 상위인지(메타인지 — 제 앎에 대한 앎)와의 관계, 그리고 기계의 자기 모형(자기
상태를 표상하는 체계는 자각을 지니는가)이 살아 있는 전선이다.
정의.겪음이 있음 — 무엇인가가 누군가에게 어떠하게 느껴지고 있는 상태
일반. 깨어 있음(수준)과 무엇이 주어져 있음(내용)의 두 뜻이 함께 쓰인다.
강조 — 의식은 본디 「여섯째 식(識)」의 이름이었다. 오늘 우리가
consciousness 의 역어로 쓰는 의식(意識) 은 메이지 번역장이 새로 만든 말이 아니라
유식학의 전문 용어를 재활용한 것이다. 원 지도에서 의식은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
— 눈·귀·코·혀·몸의 전오식(前五識), 감각별 자동 요별 — 에 이어지는
여섯째 식(第六識, mano-vijñāna), 곧 意(manas)를 뿌리로 삼아 전오식의 낱낱
요별을 통합하고 법경(法境 — 개념·기억의 대상)까지 아우르는 식이었다. 전오식과
동시에 돌며 그것들을 묶는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는 정밀한 개념까지 있었다.
여기서 식·지의 순서를 다시 따져 볼 근거가 하나 더 나온다 — 원 지도에서
통합조차 식(識)의 층에서 일어난다: 낱낱의 요별(전오식)도, 그 통합(제6식)도 모두
識의 가족이며, 자아와 논리가 따져 개입하는 지(知)는 그 다음의 일이다. 서양
관행이 의식을 인지 위의 최상층으로 그리는 것과 달리, 자원 독법의 지도에서는 「느끼고
—가리고—통합하는」 식의 일이 먼저 한 벌로 이루어지고, 지의 다룸이 그 위에 온다
(⑨ 인식 항목의 자원 독법과 한 몸의 논거다).
동서고금의 이름. 서양 계보의 뿌리는 그리스 syneidēsis —
「함께 앎」, 주로 도덕적 자기 증인 — 이고, 라틴 conscientia(con+scire)가 이를
축자역해 근대 초까지 의식과 양심을 한 낱말로 겸했다(프랑스어 conscience 는 지금도
겸한다). 데카르트·로크를 지나며 심리적 뜻이 갈라져 영어 consciousness 가 서고, 볼프가
독일어 Bewusstsein 으로 벼렸으며, 메이지 번역장이 불경의 意識 을 그 그릇으로
재활용했다 — 한 낱말에 유식학·그리스·라틴·독일의 네 겹이 쌓인 표본이다. scire 가
「가르다」(*skei-)로 소급되니, 서양 쪽 어원마저 「앎 = 가름」에서 식(識)의 요별과
포개진다.
오늘의 논점. 현상적 의식/접근 의식의 구분(블록), 「왜 그것이 느껴지기까지
하는가」라는 어려운 문제(차머스), 그리고 전역 작업공간·통합정보·고차 이론·예측처리의
경쟁 — 어느 이론도 어려운 문제를 해소했다고 인정받지 못한 채, 통합이 의식의 표지라는
직관(유식학이 제6식에 준 바로 그 기능)은 여러 이론에 살아 있다.
정의. 이 모든 겪음·앎·응답을 한 주인에게 귀속시키는 자리 — 「내가」
느끼고 「내가」 안다고 할 때의 나. 길의 마지막 역이지만, 실은 길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묶는 책의 표지 같은 자리다.
동서고금의 이름. 한자 아(我) 는 뜻밖에도 톱날 달린
창의 상형이 「나」로 가차된 글자다 — 일인칭에 본디 그림이 없어 무기를 빌려 쓴 셈이다.
산스크리트 ātman(아트만) 은 숨 계열로 풀이되는 낱말(독일어 atmen, 숨쉬다와
견주어진다)로, 우파니샤드에서 개별 자아와 우주 원리(브라만)의 합일이 선언되었다.
이에 맞서 불교는 무아(無我, anātman) — 오온의 흐름 어디에도 고정된 주인은 없다 —
를 세워, 자아를 길의 출발점이 아니라 구성물로 뒤집었다. 서양에서는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나(res cogitans)가 확실성의 주춧돌이 된 반면, 흄은 마음 안을 들여다봐도 지각의
다발뿐 자아는 만나지 못한다고 응수했다 — 동서가 같은 물음(자아는 실재인가 구성인가)의
양쪽에 각각 진을 친 형국이다.
오늘의 논점. 신경과학의 자기 모형 이론(메칭거의 「자아 터널」), 서사적 자아와
최소적 자아의 구분, 그리고 자아감의 교란(이인증, 유체이탈 경험, 전신 착각 실험)이
자아를 실험 가능한 주제로 만들었다. 「자아는 과정이지 사물이 아니다」라는 현대의 잠정
합의는 무아론과의 대화 속에서 깊어지고 있다.
그림 5 · 의식의 원 지도. 유식학에서 의식(意識)은 전오식(눈·귀·코·혀·몸의
자동 요별)을 통합하는 여섯째 식이었다 — 낱낱의 요별도 그 통합도 모두 식(識)의 층이고,
지(知)의 따짐은 그 다음이다. 식·지 순서를 다시 따져 볼 또 하나의 근거다.
길의 바탕 — 마음 · 혼 · 그리고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 心 · mind (citta, manas)
정의. 이 문서의 길 전체가 놓이는 자리 — 느끼고 알고 바라고 응답하는 작용들의
총체, 또는 그 작용들이 일어나는 터. 마음은 길 위의 한 역이 아니라 길 그 자체다.
동서고금의 이름. 영어 mind 는 「생각하다」의 인도유럽
어근 *men- 에서 왔고, 라틴 mens, 산스크리트 manas(의意) 가 같은 어근의
삼형제다 — 세 대륙의 마음 낱말이 어원상 한 집안인 드문 사례다(mental·mantra 도
그 가족). 한자 심(心) 은 염통의 상형 — 동서 공히 마음을 가슴에 두던 시절의
지도다(그리스의 kardia(염통)·phrēn(가슴 언저리 — 횡격막으로 새기는 전통이 있다)도 몸의 낱말이었다). 불교는 마음을 셋으로 갈랐다 —
심(心, citta: 쌓고 물드는 마음)·의(意, manas: 재고 향하는 마음)·식(識, vijñāna:
가려 아는 마음).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작용의 결에 따라 다른 이름을 준 것으로,
이 문서가 길을 역으로 가른 것과 같은 정신이다. 성리학은 심통성정(心統性情) — 마음이
바탕(性)과 움직임(情)을 통괄한다 — 으로 그 구조를 그렸다.
정의. 마음보다 오랜 낱말 — 살아 있음의 원리, 숨이 붙어 있음과 마음이 있음을
아직 가르지 않던 시절의 이름이다.
동서고금의 이름. 그리스 psychē 는 psychein(숨쉬다)에서,
라틴 anima 는 바람(그리스 anemos 와 동근)에서, spiritus 는 spirare(숨쉬다)
에서 — 그리고 산스크리트 ātman 도 숨 계열로 풀이된다. 한자 혼(魂) 은
云(운, 소리부)에 鬼 를 더한 형성자로, 혼백론에서 하늘로 오르는 양의 넋(魂)과 땅에
남는 음의 넋(魄)으로 갈렸다 — 구름·바람·숨. 혼은 숨이라는 은유를 여러 문명이 따로
또 같이 새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에 관하여(De Anima)』는 혼을 생명의 형상
(영양혼·감각혼·지성혼의 층)으로 그려, 이 문서의 감능(⑥)–감각(⑤)–사유(⑮) 층 구분의
가장 오랜 선조가 되었다.
길의 역들을 다 걷고 나면 바탕의 물음이 남는다 — 이렇게 일어나는 마음은 세계 안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있는가. 물질이 전부인 세계에서 겪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물리주의와 「어려운 문제」), 심과 물은 두 부류인가(이원론), 실재의 바탕은 하나인가
(일원론), 느낌의 씨앗은 만물에 두루 있는가(범심론 계열 — 이 물음의 지도는 별도 문서에
상세하다: 마음
용어 대응 백과 — 제2부 심의 형이상학). 동아시아의 기(氣) 일원론과 유식학의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이 물음의 동방 판본이다.
역마다 적은 「동서고금의 이름」들은 세 물줄기를 타고 오늘의 한국어에 이르렀다.
① 2~11세기 한역 불경이 산스크리트의 마음 분석어(vijñāna·vedanā·saṃjñā·sparśa·
smṛti·cetanā)를 識·受·想·觸·念·思 로 벼린 물줄기 — 구마라집과 현장의 대번역 사업이
그 정점이다. ② 그리스어가 놓은 기초 어휘(aisthēsis·nous·psychē)가 라틴어로, 8~10세기
아랍어 번역 운동(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을 거쳐 — 이븐 시나의 내부 감관론이 자란
곳이 이 물줄기다 — 12~13세기 톨레도의 라틴 재번역으로 유럽에 되돌아오고, 근대 독일어
(Wahrnehmung·Bewusstsein)·프랑스어·영어로 갈라진 물줄기. ③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메이지 일본이 서양 학술어를 한자 조어로 옮기며(『철학자휘』 1881, 니시 아마네의
철학·심리학) 불경 물줄기의 낱말(意識·觀念·覺)을 재활용한 물줄기 — 그래서 오늘의
한 낱말 안에 유식학의 뜻과 근대 서양의 뜻이 겹쳐 있고, 이 문서가 자원 독법을 선언하고
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지(認知)만은 20세기 후반 인지과학 번역에서 정착한 가장 새
층이다.
어원이 보여 준 동서 평행 다섯.
① 앎 = 가름 — 識(표지 세워 가려 앎) · vijñāna(갈라 앎) · scire(*skei- 가르다) ·
krinein(判斷의 가름까지). ② 기억 = 마음에 둠 — memoria 와 smṛti(念)는 같은
어근 *(s)mer- 의 형제다. ③ 마음 낱말의 삼형제 — mind·mens·manas 가 같은 어근
*men- 이다. ④ 혼 = 숨 — psychē·anima·spiritus·ātman·魂(구름). ⑤ 문지방 —
절대역(閾)의 역도 threshold 도 문지방이다. 낱말을 자원까지 파고들면, 서로 몰랐던
전통들이 같은 그림을 그렸음이 드러난다 — 그리고 가른 앎 위에 「가른 것을 다시 하나로
보는」 지혜(智·prajñā)의 층을 세운 것은 동양 지도의 고유한 한 층이다.
표의 폭 때문에 아랍어·프랑스어 열은 줄였다 — 각 역의 「동서고금의 이름」
본문과 자매편(용어 대응 백과)의 다국어 총람 표가 그 자리를 채운다.
빈칸(—)도 정보다 — 그 전통이 그 자리를 따로 세우지 않았다는 표시다.
변환(③)·감지(④)·인지(⑭)는 현대가 새로 세운 역이고, 알아차림(⑳)은 수행 전통이
서양 학술 전통보다 정밀하게 세운 역이다.
네이글 「What Is It Like to Be a Bat?」(1974), Philosophical Review 83(4) —
doi:10.2307/2183914 ·
슈나이더·시프린 「Controlled and automatic human information processing」(1977),
Psychological Review 84 —
doi:10.1037/0033-295X.84.1.1 ·
블록 「On a confusion about a function of consciousness」(1995), BBS 18 —
doi:10.1017/S0140525X00038188
부록 3 · 함께 보기 (연구소 안 문서)
이 백과의 자매편으로, 한국어·영어 학술 용어의 대응 판정(정합·경합·조건부·재배선)과
심의 형이상학 일곱 쌍(범심론~이원론), 번역의 지층·자원 해부 총람을 다룬
「마음
용어 대응 백과 — 감각에서 의식까지, 범심론에서 이원론까지」(2026-08-18~19)가 있다.
이 문서가 길을 걷는 지도라면, 그 문서는 낱말끼리의 다리를 놓는 지도다.